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기업 ASML이 미국의 대(對)중국 제재의 영향으로 올해 '실적 쇼크'를 받을 것으로 확인돼, 우리 기업들을 포함한 세계 반도체 시장이 동요하는 분위기다.
16일 세계 증권가와 업계에 따르면, ASML은 내년 매출을 300억∼350억유로(약 44조~52조원)로 추산했다. 시장이 예상한 361억유로(약 53조원)에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다. 올해 3분기 예약 매출 역시 26억유로(약 3조8655억)로 시장조사업체 LSEG가 집계한 시장 전망치 56억유로(약 8조3245억)와 차이가 컸다. 생각보다 저조한 실적 전망에 ASML 주가는 이날 16.26% 떨어졌다.
이날 ASML은 실적을 발표하기 전 공식 홈페이지에 3분기 실적이 먼저 공개되는 해프닝을 겪었는데, 실적이 생각보다 너무 저조했던 탓에 해프닝은 큰 주목을 받지 못하는 분위기다. 업계가 받은 충격은 상당해 보인다. 반도체 관련주들도 가격이 동반 하락한 것은 ASML의 부진으로 말미암아 반도체 시장에 번지고 있는 우려가 얼마나 큰지를 대변한다. 엔비디아는 4.69%, TSMC는 2.64%, 브로드컴은 3.47% 떨어졌다. AMD도 5.22% 하락했다.
ASML의 실적 전망이 좋지 못한 건 네덜란드 정부를 통해 중국으로의 ASML 장비 수출을 통제하려는 미국의 영향이 큰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미국은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축소하고 중국이 반도체 개발을 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자국 내 시장에 제재를 내리고 글로벌 기업들에 대해서도 압박을 넣고 있다. ASML에 대해선 장비 판매와 유지보수 서비스를 하지 못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중국은 ASML의 반도체 장비 판매량의 49%를 차지할 정도로 핵심고객으로 전해진다. 19%인 우리나라보다 ASML 장비를 더 많이 쓰고 있다. 이와 관련해 지난 4월 1분기 실적발표 컨퍼런스 콜에서 피터 베닝크 ASML 최고경영자(CEO)는 "판매한 장비에 대한 유지보수 서비스를 제공 못 할 이유가 없다"며 미국의 압박에 응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는데, 그와 달리 6개월 만에 실적은 곤두박질치며 ASML의 주변 공기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로저 다센 ASML 최고재무책임자(CFO)가 "(향후) 중국 매출 비중이 20%대까지 급락할 것"이라고 좋지 않은 상황을 인정하기도 했다.
ASML의 실적 부진으로 세계 반도체 시장의 흐름이 다소 바뀔 가능성이 생기면서 우리 기업들에도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ASML이 차후 허리띠를 졸라매고 비상 경영에 나설 경우, 이 회사로부터 장비를 공급받던 기업들은 악영향이 불가피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중국 수출 비중이 상당했던 반도체 기업들은 ASML을 반면교사로 삼아 제품 상황을 점검하고 중국 관련 비중을 줄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11월 대통령 선거를 전후로 중국 반도체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일 것으로 보여 반도체 시장에 미칠 지정학적 리스크는 더욱 커질 것이 분명하다.
ASML이 만드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도 주목된다. 극자외선을 이용한 빛으로 웨이퍼에 회로를 새기는 장비인데, 전세계에서 이 장비를 만들 수 있는 곳은 ASML이 유일하다. 7나노미터(nm) 이하 파운드리 공정에 꼭 필요한 장비여서, 파운드리 시장에서 경쟁하고 있는 TSMC(대만), 삼성전자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이런 가운데, 우리 기업들의 이날 주가도 하락했다. 삼성전자는 외국인 투자자들의 순매도가 이어지며 2.46% 내린 5만9500원에 거래를 마쳤다. 6만 전자 복귀 3일 만에 다시 5만 전자가 됐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지난달 3일부터 이날까지 26일 연속 삼성전자 주식 11조1300억원어치를 팔아치우면서 2022년 3~4월 기록한 25일에 하루를 더 보태 역대 최장기간 순매도 기록을 경신했다. SK하이닉스도 2.18% 내린 18만8700원에 장을 마감했다.
김형민 기자 [email protecte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