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경와인셀라]美 나파밸리 카베르네 소비뇽의 '제왕'

[아경와인셀라]美 나파밸리 카베르네 소비뇽의 '제왕'

M 최고관리자 0 3
편집자주하늘 아래 같은 와인은 없습니다.
매년 같은 땅에서 자란 포도를 이용해 같은 방식으로 양조하고 숙성하더라도 매번 다른 결과물과 마주하게 됩니다.
와인은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우연의 술'입니다.
단 한 번의 강렬한 기억만 남긴 채 말없이 사라지는 와인은 하나같이 흥미로운 사연을 품고 있습니다.
'아경와인셀라'는 저마다 다른 사정에 따라 빚어지고 익어가는 와인 이야기를 하나하나 꺼내 들려 드립니다.
newhub_2024101715431962988_1729147399.jpg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차를 타고 북쪽으로 한 시간가량 달리면 닿을 수 있는 나파 밸리(Napa Valley). 과거 이 지역에 살던 원주민 와포(Wappo) 부족은 연어와 물새가 가득하던 이곳을 '풍요의 땅'이라는 뜻을 담아 나파라고 불렀다.
나파 밸리에는 야생동물 외에 도 야생포도가 풍성하게 자랐는데, 이를 보고 조지 욘트(George Yount) 같은 초기 정착자들은 1830년대에 이미 이곳의 잠재력을 깨닫고 포도를 재배했다.


나파 밸리에는 1861년 최초의 상업 와이너리가 설립됐고, 1889년에는 그 수가 140여개로 늘어날 정도로 성행했다.
하지만 나파 밸리가 캘리포니아는 물론 미국 최고의 와인 산지로 이름을 알리게 된 건 그보다 한참 뒤의 일인데, 1966년 로버트 몬다비(Robert Mondavi)의 등장이 그 시작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몬다비는 와인 라벨에 생산지역을 명시하는 유럽과는 달리 포도의 품종을 명시하는 방식을 도입하는 등 기술 혁신과 전략적인 마케팅으로 미국 와인을 유럽 와인과 대등한 수준으로 끌어올린 미국 와인업계의 대부다.
로버트 몬다비의 등장 이후 나파 밸리의 와이너리들은 빠르게 성장했다.
특히 1976년 프랑스 와인과 겨뤄 압승을 일궈낸 블라인드 테스트는 일명 '파리의 심판'으로 불리며 나파 와인의 뛰어난 품질을 세계에 알리는 결정적인 배경이 된다.


이후 나파 밸리는 신대륙 최고의 명산지 지위를 공고히 다져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세대교체를 피할 순 없었다.
1970년대 이후 나파 밸리의 성장을 이끌었던 초기 설립자와 혁신가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며 와이너리 운영은 2세대, 3세대로 넘어갔는데,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와이너리가 시장에 매물로 나왔다.
포도 재배와 양조 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와이너리에서 손을 떼는 일이 늘어난 것이다.
로버트 몬다비 와이너리도 예외는 아니어서 2004년 주류복합기업인 컨스텔레이션 브랜즈에 인수됐고, 국내에서는 신세계가 2022년 쉐이퍼 빈야드를 인수하기도 했다.


newhub_2024101715564463021_1729148204.jpg

와이너리의 소유권이 설립자와 그 가족의 손을 떠난 것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기는 어렵다.
거대 자본의 투입으로 설비의 현대화와 양조의 체계화 등을 이뤄 이전보다 개선된 와인이 탄생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애정이 사라진 소유주의 손에서 포도밭과 와인은 서서히 힘을 잃어갈 수밖에 없는데, 그보다는 의욕 넘치는 신생 양조가나 야심 있는 사업가의 손으로 넘어가는 편이 오히려 나은 길일 수 있다.


다만 와이너리의 소유권 변경은 많은 경우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여러 차원의 변화를 맞이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기존 설립자의 철학이나 와인메이커의 손맛을 사랑했던 이들이라면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와이너리의 손 바뀜이 그 어느 곳보다 활발한 나파 밸리이지만 그 중심에서 한 세기 이상 오롯이 가족들의 힘으로 포도밭을 가꾸고 와인을 양조하며 자신들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는 와이너리가 있다.
가족 경영의 가치를 강조하며 올해로 설립 50주년을 맞은 '케이머스 빈야드(Caymus Vinyards)'가 그 주인공이다.


newhub_2024101715574763025_1729148267.jpg
"대체 불가" 진한 풍미의 러더포드 카베르네 소비뇽

"우리 가족은 7대에 걸쳐 나파 밸리에 살며 이곳을 사랑해왔습니다.
우리 손으로 땅을 일구면서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에 대한 통찰력을 얻었는데, 이는 어떤 농장 매뉴얼이나 책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 < 척 와그너(Chuck Wagner), 케이머스 오너 와인메이커 >


케이머스 빈야드의 역사는 프랑스 알자스 출신 와그너 가문에 의해 시작됐다.
1906년 칼 와그너는 나파 밸리의 러더포드(Rutherford)에 포도밭 70에이커를 구입해 포도나무를 심었고, 1915년부터 와그너 와이너리라는 이름으로 와인 생산을 시작했다.
와이너리는 연간 3만 갤런(약 11만3500ℓ)을 생산할 정도로 성공을 거뒀지만 1919년 금주법과 함께 내리막을 걸었고, 이후 자두와 호두 등 다양한 작물 재배와 함께 소량의 와인을 생산하는 정도로 사업은 축소됐다.


반전의 계기를 마련한 건 칼의 아들인 찰리 와그너와 그의 아내 로나였다.
양조용 포도에 미래가 있다고 판단한 이들은 1960년대 기존 작물들을 걷어내고 피노 누아(Pinot Noir)와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등의 고품질 품종을 자신들의 땅에 심었다.
이들의 포도는 점차 높은 품질을 인정받으며 인근의 와인 양조장에 판매됐고, 결국 자신들의 고품질 포도를 토대로 와인 양조에 '올인'하는 결단을 내린다.
1972년 케이머스 빈야드의 탄생이었다.


newhub_2024101715534963009_1729148029.jpg

케이머스를 설립한 건 찰리와 로나 부부였지만 지금의 케이머스를 만든 건 아들인 척 와그너였다.
와이너리 설립 당시부터 아버지와 함께 양조를 담당한 척은 첫해부터 풍부한 캐릭터와 복합성을 지닌 와인을 만들어냈다.
특히 러더포드에서 나고 자란 그는 이 지역의 떼루아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토대로 카베르네 소비뇽의 재배와 양조에서 천부적인 감각을 보여줬다.


케이머스가 뿌리를 내린 러더포드 지역은 배수가 잘 되는 자갈 섞인 모래 토양의 조금 높은 평지로, 이러한 토양에선 태양의 복사 에너지값이 높아 포도가 빨리 익기 때문에 나파 밸리의 다른 지역 와인과 비교해도 풍미가 강렬한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이유로 러더포드는 따뜻해야 충분히 완숙될 수 있는 카베르네 소비뇽의 재배 비율이 굉장히 높다.


케이머스 와인은 짙은 색상과 풍부한 과실 맛, 복합적인 풍미, 벨벳 같은 타닌으로 요약되는 '투박하고도 귀족적인' 스타일이 특징이다.
박정희 케이머스 빈야드 아시아 지사장은 포도나무가 꽃을 피우는 시점부터 열매를 수확하는 시기의 길이인 '행타임(hangtime)'을 최대한 길게 가져가는 철칙이 케이머스 시그니처 스타일의 비결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케이머스는 포도 씨가 갈색이 될 때까지 최대한 과실이 익게 두는데, 이렇게 충분히 익을 경우 타닌이 둥글둥글하고 부드러워진다"며 "진하게 농축돼 잘 숙성됐기 때문에 케이머스 와인은 수치상으로는 당도가 거의 없는 엑스트라 드라이 와인임에도 강한 과실향으로 당도가 높게 느껴진다"고 설명했다.


와인 스펙테이터 '올해의 와인' 두 차례 1위…유일의 기록
newhub_2024101715461362992_1729147573.jpg

척 와그너가 '카베르네 소비뇽의 제왕'이라는 별명을 갖게 된 건 이 중에서도 '케이머스 스페셜 셀렉션 카베르네 소비뇽(Caymus Special Selection Cabernet Sauvignon)'이란 와인에 상당한 지분이 있다.
1975년 척은 자신이 양조한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 중 유난히 맛이 좋은 배럴이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그것들을 따로 분류해 스페셜 셀렉션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출시한다.
이 와인은 1989년 '1984 빈티지'가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 올해의 와인 1위를 차지한 데 이어 5년 뒤 '1990 빈티지'가 다시 한번 1위에 올라 두 차례 1위에 오른 유일한 와인이라는 기록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카베르네 소비뇽 100%로 만든 스페셜 셀렉션은 거침없는 힘과 직설적인 캐릭터, 짙은 농도가 매력적인 와인이다.
보기 드물 정도로 진한 농도와 빛깔을 지녔고, 의도적으로 절제하지 않은 힘 있는 오크향과 함께 겹겹이 나타나는 블랙커런트, 모카, 검은 체리, 자두 등의 향이 박진감 넘치게 펼쳐지는 게 특징이다.
상당한 양의 타닌을 함유하고 있음에도 부드러우며, 긴 여운과 뛰어난 질감을 보여준다.


newhub_2024101715560663018_1729148166.jpg

케이머스의 강점으로 꼽히는 또 다른 포인트는 품질의 일관성이다.
척 와그너는 매년 다른 포도 재배 환경 속에서도 빈티지별 품질의 차이가 없는 와인 생산을 목표로 한다.
케이머스는 나파 밸리 내 16개 세부 지역(AVA) 중 산악부부터 평지부까지 다양한 떼루아의 8개 지역의 포도밭을 고루 경작한다.
이렇게 다양한 밭에서 재배한 포도를 블렌딩하는 방식으로 뛰어난 복합미, 놀라운 집중력과 응축력의 과실미, 풍만하면서도 유연한 타닌, 뛰어난 밸런스를 갖춘 최고의 카베르네 소비뇽을 만들고 있다.


이러한 운용의 묘가 잘 드러난 와인이 '케이머스 나파 밸리 카베르네 소비뇽(Caymus Napa Valley Cabernet Sauvignon)'다.
이 와인은 앞서 언급한 케이머스 시그니처 스타일의 베스트 셀링 제품이다.
다크 체리 등 블랙베리류의 진한 과실 향이 풍부하고, 섬세한 바닐라 노트와 코코아, 다크 초콜릿, 스위트 타바코 등의 복합적인 맛, 부드러운 타닌감, 완벽한 균형미를 자랑하며 입 안에 오래 남아 긴 여운을 제공한다.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와그너 家의 '케이머스' 이야기
newhub_2024101715542663011_1729148067.jpg

열아홉에 와인 메이킹을 시작한 척 와그너도 어느덧 70대에 이르렀지만 와그너 가문의 케이머스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척 와그너의 네 자녀 중 찰리와 제니 두 자녀가 그와 함께 농사를 짓고 가족의 유산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단순히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는 것을 넘어 자신들의 독립적인 브랜드를 통해 케이머스 빈야드에 다양한 색을 더하고 있다.
척과 함께 밀실에 모여 스페셜 셀렉션에 들어갈 와인을 분류하는 것 역시 이 둘의 몫이다.


장남인 찰리 와그너는 단일 품종 와인에 집중하던 케이머스의 관습을 깨고 '코넌드럼(Conundrum)'이란 블렌디드 와인 브랜드를 만들었고, '메르 솔레이(Mer Soleil)'라는 브랜드를 통해 샤르도네(Chardonnay) 와인도 생산하고 있다.
제니 와그너 역시 어머니의 성을 딴 브랜드 '에멀로(Emmolo)'를 통해 메를로(Merlot)와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 품종에 집중하고 있다.
차남인 조셉 와그너 역시 케이머스 밖에서 피노 누아를 중심으로 독립적으로 '메이오미(Meiomi)'와 '퀼트(Quilt)'라는 두 브랜드를 연달아 성공시키며 유명 와인메이커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각기 다른 품종에서 강점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도 재미있는 지점이다.


"우리는 마음 깊이 우리 자신을 농부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 가족 와이너리가 설립된 이유이고, 오늘날에도 품질과 혁신 면에서 우리를 차별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newhub_2024101715561663019_1729148176.jpg

구은모 기자 [email protecte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

0 Comments

실시간 전세계에서 몰리는 경기 순위

Chat ×